작전과 병법


견벽청야 (堅壁淸野 굳을 견, 벽 벽, 맑을 청, 들 야)

삼국지에서 위의 조조가 영주의 복양에 진을 치고 있는 여포를 강하게 공격하였으나 여포는 무리한 싸움을 피하고 지구전으로 맞섰다. 이때 서주목사 도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조조는 서주를 빼앗기 위해 군사를 돌리려 하였다. 그러나 참모인 순욱이 이 작전을 말렸다.

“도겸이 죽으면서 서주의 인심이 동요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깔보는 것은 금물입니다. 지금은 보리를 걷어 들일 때이므로 서주에서는 주민을 총동원해 보리를 성내로 걷어 들이고 성벽을 다져 전쟁 준비에 만전을 기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견벽청야’이므로 우리의 공격은 먹혀들지 않을 것이며 만일 이때 여포가 틈을 노려 공격해 온다면 그때는 우리가 끝장입니다.” 순욱이 조조에게 진언하자, 조조는 서주탈환 작전을 취소하고 여포 공략에 힘을 쏟아 결국에는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그 후대에 청태조 누르하치의 공격에 영원성을 사수하며 청 군대를 패퇴시켰던 원숭환의 견벽청야 작전도 유명하다.

견벽청야(堅壁淸野)는 중국에서 고대로 부터 널리 사용해 온 방어전술의 하나로, 해자를 깊이 파고 성벽의 수비를 견고히 하는 한편, 성 밖 들판에 있는 모든 곡식을 성내로 거두어 들여서 공격하는 적의 군량미 조달에 타격을 입히는 전법으로, 우세한 적에 대해 약자가 쓰는 전술이다.


교병필패 (驕兵必敗 교만 교, 군사 병, 반드시 필, 패할 패)

전한시대의 선제가 서역의 차사국을 정복하기 위해 정길과 사마희에게 출병을 명하자, 두 사람은 대군을 이끌고 차사를 공격해 들어갔다. 그러자 다급한 차사왕은 개노국에 구원병을 요청했지만 개노국이 구원병을 보내주지 않자 할 수 없이 항복하고 말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개노국의 대신들은 후회하고 왕에게 “차사국 땅은 기름지고 우리 땅과 가까우므로 언제 침략을 당할지 모를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 위기국면을 벗어나려면 승리감에 도취해 군기가 해이해진 적의 허점을 노려 기습공격을 감행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라고 진언했다.

이에 개노국왕은 이를 받아들여 즉시 기습공격을 감행해 점령군을 포위하고 곤경에 빠뜨렸다.

위기에 처한 정길은 즉시 선제에게 구원요청의 파발마를 보냈다. 그러나 구원병을 즉시 파병하려는 선제에게 재상이 다음과 같이 말하며 극구 만류했다.

“교만한 군대가 그 위세를 뽐내는 것은 교병(驕兵)이며 이런 교병은 필패라고 했습니다.” 이에 깊이 깨달은 선제는 자신도 교만했음을 뉘우치고 즉시 증병계획을 취소시켰다 한다.

같은 뜻으로 ‘병교자멸(兵驕者滅 ; 군사에서 교만한 자는 멸한다.)’이 있다.

여기서 유래한 교병필패(驕兵必敗)는강병을 자랑하는 군대나 싸움에 이기고 뽐내는 군사는 반드시 패한다는 말이다.


금성탕지 (金城湯池 쇠 금, 재 성, 끓을 탕, 못 지)

진시황제가 죽고 2세 황제 호해가 즉위한 뒤 중국은 전국적인 혼란기에 접어들었다.

진시황이 죽자 때를 같이하여 천하 각지에서 잠복하고 있던 여섯 강국의 제후와 종실들이 진나라를 타도하기 위해 일어났다. 그들은 제각기 왕이라 칭하고 군현의 책임자를 죽이는 등 기세가 거칠었다.

진나라의 위세는 하루아침에 곤두박질쳤다. 이때에 무신이라는 이가 조나라의 영토를 평정하고 스스로 무신군이라 칭했다. 그 때에 범양 현령인 서공이 방비를 굳혀 무신군에게 저항할 자세를 보이자 변설가 괴통이라는 모사가 서공을 찾아가 사태의 심각성을 일깨웠다.

“당신은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십여년 동안 관직에 있으면서 혹독한 진나라의 법을 시행하여 그 덕분에 몸이 상하거나 재산을 빼앗긴 사람들로 인해 원망하는 마음이 깊어졌을 게 아닙니까. 그러나 어느 누구도 당신에게 해를 끼치려고 하지 않는 것은 진나라의 위세가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진나라가 무너졌기 때문에 당신을 죽여 원한을 풀려고 할 것입니다.”라고 하자, 그는 “방책이 없겠소?”라고 했다.

이에 “나는 당신을 대신하여 무신군을 만나 당신께서 범양을 공격하여 현령이 항복했을 경우, 만약 그를 소홀히 대한다면 각국의 현령들은 손에 쥔 부귀를 놓치지 않으려고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것입니다. 그들은 준비를 충분히 하여 마치 ‘끓는 물에 둘러싸인 강철성(金城湯池)’처럼 견고하게 수비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범양 현령들을 극진히 대접해 준다면 각국의 현령들은 앞 다투어 항복해 올 것입니다. 이렇게 말한다면 무신군도 내 말을 들어줄 것입니다.”

서공과 무신군은 괴통의 진언을 흔쾌이 받아들여 항복한 서공을 후히 대우했기 때문에 이 말을 들은 다른 30여 성도 속속 항복해 왔다. 이렇게 하여 범양 사람들은 전란의 소용돌이를 비켜 가게 되었다.

여기에 나오는 금성탕지(金城湯池)란 말은 ‘쇠로 만든 성과 그 성을 둘러싸고 있는 끓는 연못’이라는 뜻으로, 방어시설이 아주 튼튼한 성을 말한다.

금성철벽(金城鐵壁)· 탕지철성(湯池鐵城)· 철옹성(鐵壅城)도 같은 뜻이며, 금탕(金湯)으로 줄여 쓰기도 한다.


금적금왕 (擒賊擒王 사로잡을 금, 도둑 적, 사로잡을 금, 임금 왕)

당나라 때의 시인 두보의 시에 이런 내용이 있다.

활을 당기려면 강하게 당기고 挽弓當挽强,

화살을 쏘려면 멀리 쏘아야 한다 用箭當用長.

사람을 쏘려면 먼저 그 말을 쏘고 射人先射馬,

적을 잡으려면 먼저 그 왕을 잡아라 擒賊先擒王.

적의 장수를 잡으면 적의 전체 병력을 무너뜨릴 수 있으므로 싸움에서는 우두머리를 먼저 잡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는 뜻이다.

당나라 숙종 때에 장순과 윤자기의 군대가 전투를 하였는데, 장순의 군대가 적을 공격하여 혼란에 빠뜨리고 장순은 윤자기를 죽이려 하였으나 얼굴을 몰랐다. 그래서 장순은 꾀를 내어 군사들에게 볏짚으로 만든 화살을 쏘게 하였는데, 그러자 화살이 볏짚인 것을 보고는 윤자기의 군사들 중에서 많은 이가 장순 군대의 화살이 모두 없어졌다 생각하여, 한꺼번에 윤자기에게 몰려가서 보고하는 것을 보고 윤자기를 쉽게 찾아낼 수 있었다.

장순은 즉시 부하 장수에게 시켜 일제히 윤자기를 겨냥하여 진짜 화살을 쏘게 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윤자기의 왼쪽 눈을 맞히면서 대장을 잃게 된 윤자기의 군대를 참패케 했다.

이 처럼 금적금왕(擒賊擒王)은장수를 잡으려면 먼저 그 말을 쏜다는 뜻으로 적군을 사로잡으려면 우두머리부터 사로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요즘에는 힘든 일은 미루지 말고 빨리하라는 교훈으로도 쓰인다.


배수진 (背水陣 등 배, 물 수, 진칠 진)

배수진의 전략에 대해서 역사에 여러번 나온다. 그 중에 하나를 소개하면 이렇다.

한나라 유방이 제위에 오르기 2년 전인 204년, 명장 한신은 유방의 명령에 따라 장이와 함께 위나라를 격파한 여세를 몰아 병사 수만 명을 이끌고 조나라를 공격하였다. 조나라는 군사 20만 명을 동원하여 한나라가 쳐들어올 길목에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조나라의 전략가 이좌거가 재상 진여에게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지나가는 한나라 군사를 공격하자고 건의하였으나 기습을 별로 좋아하지 않은 진여에 의해 묵살되었다.

이 정보를 입수한 한신은 기병 2,000명을 조나라가 쌓은 성채 바로 뒤편에 매복시켰다. 그러면서 한신은 "우리가 달아나는 것을 보면 조나라 군사는 우리를 좇아올 것이다. 이때 조나라 성안으로 들어가 한나라의 붉은 깃발을 꽂아라." 또한 병사 1만을 먼저 보내에 정경에서 나와 강을 등지고 진을 치게 하였다. 조나라 군사는 이를 바라보며 크게 웃었다 信乃使萬人先行 出背水陣 趙軍望見而大笑.

조나라 군사가 성에서 나와 공격하자 한신은 여러 차례 접전을 치르면서 거짓으로 강을 등지고 있던 1만의 아군이 있는 배수의 진까지 후퇴 하였다. 기세를 제압하였다고 판단한 조나라 군사는 한신을 맹렬히 추격하였다. 이때를 노려 한신은 매복시켜 둔 군사에게 조나라의 성채를 점령하도록 하였고, 나머지 군사는 배수진을 친 곳에서 필사적으로 싸웠다.

결사적인 항전에 지친 조나라 군사는 견디지 못하고 성채로 돌아와 보니 이미 한나라 깃발이 꽂혀 있는 것을 보고는 한신의 군대에 패하고 말았다.

오랜 원정을 거듭해 조나라보다도 전력이 떨어진 한신은 강을 등지고 군사를 주둔케 한 배수진의 전술을 쓴 것이다. 이는 등 뒤에 강물이 흐르니 싸움에 져서 죽든지 강물에 빠져 죽든지 죽는 것은 마찬가지이므로, 죽기 아니면 살기로 싸움에 임하는 것으로, 막다른 길에 몰려 사생결단 할 수밖에 없는 정신 상태로 결전케 하는 것이다.

비슷한 말로 파부침선(破釜沈船:항우가 자기의 군사에게 솥을 깨고 배를 침몰시킨 후 강을 등지고 싸우게 함),사량침선(捨糧沈船), 기량침선(棄糧沈船:파부침선과 동일 사건에서 나온 것으로 ‘군량미를 버리고 배를 침몰시킨다.’는 뜻),제하분주(濟河焚舟 : 진(秦)나라 군주 목공은 진(晉)나라를 침공하여 황하를 건너 타고 간 배를 태우고, 진나라의 왕관과 땅을 빼앗고 진나라 도읍의 성곽까지 육박했다. 그러나 진나라 사람이 싸우러 나오지 않아 결국 모진에서 황하를 건너, 전에 효 싸움에서 죽은 사람들의 시체를 거두어 무덤을 쌓고 돌아갔다.)

전략에서 유래한 배수진[背水陣]은 물을 등지고 진을 친다는 뜻으로 어떤 일에 결사적인 각오로 임한다는 말이다.


상산사세 (常山蛇勢 항상 상, 뫼 산, 뱀 사, 기세 세)

손자의 구지편(九地篇)에서 다음과 같은 병법을 말하였다.

‘병사를 쓰는데 아홉 가지 방법이 있다. 그 중 가장 마지막 방법을 사지(死地)라 한다. 이는 주저하지 않고 일어나서 싸우면 반드시 살 길이 있으나, 기가 꺾이어 우물쭈물하면 패하고 마는 필사의 지이다. 진퇴양난의 필사적인 상황에서는 병사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이판사판으로 싸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지혜롭고 유능한 장군의 용병술은 상산에 사는 솔연(率然)이란 머리가 둘인 큰 뱀처럼 행동해야 한다. 솔연은 머리를 치면 꼬리가 덤비고, 꼬리를 치면 머리가 덤비고, 몸통을 치면 머리와 꼬리가 한꺼번에 덤벼드는 뱀이다.’

이다.

상산사세(常山蛇勢)는 상산에 사는 뱀인 솔연처럼 적이 습격하면 모두가 서로 원호하는 진법을 사용하는 것을 비유하여, 상산의 뱀 같은 기세라는 뜻으로, 적이 공격하면 조직적이고 긴밀히 연락하여 대처하는 것이나 앞과 끝이 잘 맺어진 완벽한 문장을 비유한 말로 쓰인다.

상산은 산둥성 주청현에서 남쪽으로 약 20리 떨어진 곳에 있는 산이다.


선발제인 (先發制人 먼저 선, 필 발, 제압할 제, 사람 인) or 선즉제인 (先則制人 곧 즉 則)

사기의 항우본기에 나오는 말이다.

진(秦)나라의 시황제가 죽고 그의 아들인 호해가 즉위한 7월에 진시황 이래 계속되는 폭정에 항거하여 대택향에서 900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궐기한 날품팔이꾼 진승과 오광은 단숨에 기현을 석권하고 하남성의 회양에 입성했다. 이어 이곳에 장초라는 나라를 세우고, 왕위에 오른 진승은 옛 6개국의 귀족들과 그 밖의 반진(反秦) 세력을 규합하여 진나라의 도읍 함양을 향해 진격했다.

이에 자극을 받은 강동의 회계태수 은통은 군도(郡都) 오중의 유력자인 항량을 불러 거병을 의논했다.

항량은 진나라 군사에게 패사(敗死)한 옛 초나라의 명장이었던 항연의 아들인데, 고향에서 살인을 하고 조카인 항적(籍 항우의 옛 이름)과 함께 오중으로 도망온 뒤 타고난 통솔력을 십분 발휘하여 곧 오중의 실력자가 된 사람이다.

회계 군수 은통은 항우의 숙부인 항량에게 “강서 지방은 모두가 반란을 일으켰으니, 하늘이 진나라를 멸망시키려는 때가 온 것이오. 내가 들으니, 먼저 행동하면 남을 제압하고, 나중에 행동하면 남에게 제압당한다고 하더이다 吾聞先卽制人, 後卽爲人制人. 내가 군대를 일으키려 하니, 그대와 환초를 장군으로 삼으리다.”라고 하였다. 이때 환초는 도망쳐 택중에 있었다.

항량은 “환초가 도망친 곳을 아는 사람은 오직 내 조카인 항적(항우)뿐입니다.”라고 말하고는 밖으로 나와 항우에게 칼을 들고 문 밖에 대기하라고 일렀다. 그러고는 다시 안으로 들어가 은통과 대좌한 뒤 “항적을 불러 환초를 부르라는 명을 받들게 하시지요.”라고 말하니, 은통이 응낙하였다. 항량이 항우를 불러들인 뒤 눈짓을 하며 “쳐라”하고 말하자, 항우가 칼을 뽑아 은통의 머리를 한 칼에 베어 버렸다. 항량은 군수인 은통의 머리를 들고 그의 인수(印綏)를 차고 나왔다. 이에 은통의 부하들이 크게 놀라 우왕좌왕하니, 항우가 베어 죽인 자가 100명에 가까웠다. 그러자 관아의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며 엎드려서는 감히 일어서지 못하였다.

이후 항량은 스스로 회계의 태수가 되어 은통이 거느리던 군사 8천 명을 이끌고 함양으로 진격하던 중에 죽었다.

한서(漢書)의 진승항적전(陳勝項籍傳)에는 항량이 은통에게 “먼저 행동하면 남을 제압하고, 나중에 행동하면 남에게 제압당한다 先發制人, 後發制於人.”라고 말한 것으로 실려 있다.

선즉제인(先則制人)은 상대편이 준비하기 이전에 선수를 쳐 대세를 장악한다는 뜻이며, 여기서 유래하여 선발제인(先發制人) 은 남보다 먼저 일을 착수하면 반드시 남을 앞지를 수 있음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즉, 선수를 치면 상대편을 제압할 수 있다는 뜻으로, 기선을 제압해야 승리할 수 있다는 말이다.

- 후발제인 (後發制人 뒤 후, 필 발, 제압할 제, 사람 인)

순자의 의병(議兵)편에 ‘뒤에 출발하여 먼저 도달하는 것이 용병의 중요한 술책이다 後之發 先之至 此用兵之要術也.’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

전투에 임하여서는 적이 전열을 정비하여 그 기세가 날카로울 때는 정면으로 상대하지 말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나 기다렸다가, 적의 전열과 기세가 흐트러진 틈을 타서 공격하여 적을 제압하는 용병술을 말하는 것이다.

전국책(戰國策)의 제책(齊策)편에 ‘천리마라도 오래 달려 피로해진 뒤에는 평범한 말도 그 보다 빨리 달릴 수 있고, 맹분(孟賁)과 같은 뛰어난 용사라도 피곤해져 힘이 빠지고 난 뒤에는 평범한 여자라도 그를 이길 수 있다.’라는 말이 있다.

평범한 말이 천리마를 이길 수 있고, 평범한 여자가 맹분 같은 용사를 이길 수 있는 것은 후발제인, 곧 상대방이 힘이 빠지기를 기다렸다가 제압하는 전략을 활용하면 가능한 것이다.

오늘날 중국의 국방 전략은 '남이 나를 침범하지 않으면 나도 남을 침범하지 않으며, 남이 나를 침범하면 반드시 나도 남을 침범한다 人不犯我 我不犯人 人若犯我 我必犯人.'는 것이데, 이 역시 후발제인의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후발제인(後發制人)은 뒤에 손을 써서 상대방을 제압한다.'라는 뜻으로, 적을 상대할 때 한 걸음 양보하여 그 우열을 살핀 뒤에 약점을 공격함으로써 단번에 적을 제압하는 전략을 말한다.

먼저 공격하여 적을 제압하는 전략인 선발제인(先發制人)에 상대되는 개념이다.


성하지맹 (城下之盟 성 성, 아래 하, 어조사 지, 맹세 맹)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나오는 말이다.

‘그 계책을 따르니 교(絞)의 사람들은 초나라의 인부 30명을 사로잡았다. 이튿날에는 교의 사람들이 서로 앞을 다투어 나서서 초나라 인부들을 쫓아 산 속으로 달려갔다. 초나라 군사들이 그 북문을 지키고 산 아래에 숨어 있었으므로 교의 사람들은 대패하여 성 아래에서 맹세하고 돌아갔다 從之 絞人獲三十人 明日絞人爭出 驅楚役徒於山中 楚人坐其北門 而覆諸山下 大敗之 爲城下之盟而還.’

위의 글은 초(楚)나라가 교로 쳐들어 남문에 진을 쳤을 때의 일이다. 초나라의 모사인 굴하가 “교의 사람들은 매우 경솔하니 땔나무를 하는 인부에게 호위병을 붙여 내보내어 유인하면 어떤지요?”라고 계책을 제안하였다. 그러자 장군이 수용하여, 초나라의 인부들이 교의 군사들이 보이는 다른 성문 앞의 가까운 산에서 땔감을 하게 하였다. 이것을 보고 교의 군사들이 성문을 열고 나와 먼저 30명의 포로를 잡아가서 공적을 세웠다. 그러자 이튿날에도 초나라의 병사들이 비무장으로 나무하는 것을 보고는, 서로 초나라의 나무꾼을 잡아서 공을 세우려고 앞 다투어 성문을 열고 나왔다. 이 때에 매복했던 초나라의 군사들이 순식간에 성문을 들이쳐 교를 점령하여 항복을 받았다(성 아래에서 맹세하게 했다).

성하지맹(城下之盟)은 교의 사람들이 성 아래까지 진격해 들어온 초나라에게 항복할 것을 맹세하여 초나라에게는 압도적인 승리요, 교에게는 굴욕적인 패배다. 즉, 성 아래에서 맹세한다는 뜻으로, 굴욕적인 항복이나 치욕적인 강화를 비유한 말이다.


손방투지 (孫龐鬪智 손자 손, 어지러울 방, 싸울 투, 지혜 지)

손빈과 방연은 귀곡자(鬼谷子)의 문하에서 함께 병법을 배웠다.

방연은 위나라 혜왕에게 기용되어 부근의 약소국가들을 정벌하는 공을 세웠다.

제나라 사람인 손빈은 그 재능이 방연보다 한 수 위였다. 혜왕도 손빈의 명성을 듣고 있었으므로, 동문수학한 방연에게 그를 초빙하도록 하였다. 방연은 손빈의 재능을 시기하여, 혜왕에게 손빈이 제나라와 밀통한다고 모함하였다. 이에 손빈은 슬개골을 잘리는 형벌을 당하고, 얼굴에는 죄수임을 나타내는 문자가 새겨졌다. 얼마 뒤 손빈은 위나라를 방문한 제나라 사신들에게 구출되어 제나라로 돌아왔다. 제나라의 대장 전기는 위왕에게 손빈을 천거하였다.

후에 위나라가 조나라를 공격하자, 조나라는 제나라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위왕은 전기와 손빈을 각각 대장과 군사로 삼아 군대를 파견하였다. 손빈은 조나라를 공격하는 데 병력을 투입하여 방비가 허술해진 위나라의 수도 대량을 공격하였다. 그리고는 방연이 조나라 공격을 중단하고 철수하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공격하여 대승하였다.

‘위위구조(圍魏救趙 위나라를 포위하여 조나라를 구하다)’라는 고사성어는 여기서 유래되었다. 그 후 위나라는 다시 한나라를 침공하였다. 제나라 선왕은 한나라의 구원 요청을 받고 이 때도 전기와 손빈을 파견하였다. 손빈은 이번에도 한나라를 구하러 가지 않고 위나라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 사실을 알게 된 위나라가 손빈이 이끄는 제나라의 군대 쪽으로 대군을 보내었는데, 제나라 군대는 이미 물러간 뒤였다.

위나라의 장수 방연이 제나라의 군대가 머물렀던 곳을 살펴보니 병사들이 솥에 밥을 지어 먹은 흔적이 족히 10만 명은 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튿날에는 솥의 숫자가 5만 명으로 줄어 있었고, 그 다음 날에는 2만 명으로 줄어 있었다.

이걸 본 방연은 제나라 병사들이 탈영하여 줄어든 것이라 믿고, 이 틈에 제나라를 섬멸하기 위하여 군대를 이끌고 추격하였다. 마릉에 이르러 방연이 병사들을 독려하여 진군하는데, 앞에 나무가 쓰러져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방연이 살펴보니 거기에는 “방연이 이 나무 아래서 죽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방연은 즉시 후퇴하려 하였으나 사방에서 제나라 군대가 공격해 왔다. 제나라 군대의 솥 숫자가 줄어든 것은 방연이 경계심을 풀고 공격해 오도록 유도한 손빈의 책략이었던 것이다. 방연은 퇴로가 끊기자 자결하였다.

이 고사는 사기의 손자오기열전(孫子吳起列傳)에 실려 있다.

여기서 유래한 손방투지(孫龐鬪智)는 ‘손빈과 방연이 지혜를 다투다.’라는 뜻으로, 비슷한 재능을 지닌 사람이 계책을 써서 기량을 겨루거나, 어제의 친구가 오늘은 원수가 되어 생사를 다투는 일을 비유하는 말이다.


안도 (安堵 편안할 안, 담 도)

전국시대 후기 연나라 소왕은 명재상 악의를 앞세워, 5개 제후국과 연합하여 제나라를 쳤다.

악의는 5년 동안 제나라의 70여 성을 함락했지만 즉묵과 거, 2개의 성만 항복하지 않았다.

제나라 민왕은 거성으로 몸을 피했다. 그리고 즉묵 성을 지키는 전단은 병졸들과 함께 궂은일도 기꺼이 하면서 자기 식구 모두를 군에 편입시켜 군대의 사기를 높이면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연나라 소왕이 죽고 혜왕이 즉위하자 전단은 첩자를 보내어 혜왕과 악의를 이간하는 한편 연나라 장군들에게 돈을 보내면서 거짓 항복문서도 함께 보냈다.

“즉묵 성이 함락된다면 우리 가족을 포로로 잡거나 약탈하지 마시고, 집안에서 편안히 살 수 있도록(安堵)해 주십시오.”라고 하여 연나라 군사가 방심하고 있을 때, 전단은 쇠뿔에 칼을 묶고 꼬리에 불을 붙여 어둠을 틈타 적진으로 놓아 보내는 저 유명한 화우지계(火牛之計)를 써서 연나라 군대를 격파했다. 마침내 빼앗긴 70여 성은 모두 수복되고 피란지에서 목숨을 잃은 민왕의 대를 이은 양왕도 거에서 도읍인 임치로 돌아올 수 있었다.

여기서 유래한 안도(安堵)는 ‘담 안(집안)에서 편안히 살다.’라는 말로서, 어떤 어렵고 중대한 일의 한 고비를 넘기고 마음을 놓고 산다는 뜻으로 쓰인다.


애병필승 (哀兵必勝 슬플 애, 병사 병, 반드시 필, 이길 승)

노자도덕경 69장에 “적을 가벼이 여기는 것보다 더 큰 재앙이 없다. 적을 가벼이 여기는 것은 자치하면 나의 보배를 잃게 되는 일이다. 그러므로 거병하여 서로 항거할 때는 슬퍼하는 자가 이긴다 禍莫大於輕敵, 輕敵幾喪吾寶, 故抗兵相加, 哀者勝矣”라고 하였다.

상대방으로부터 핍박을 당한 쪽은 마음속에 비분의 감정을 품게 되기 때문에 반드시 적을 눌러 이길 수 있다는 말이다.

여기서 유래하여 애병필승은 전투중인 양쪽 군대의 전력이 대등할 때는 비분에 차 있는 쪽의 군대가 승리한다는 뜻으로 사용되며, 적으로부터 수모를 받아 분기하여 저항하는 군대가 반드시 승리를 쟁취한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이를 병법에 응용하여 아군 병사들을 분노하게 만들어 싸움에 임하게 함으로써 승리를 도모하는 계책을 애병지계(哀兵之計)라고 한다.

중국의 대표적 병법서인 손자 작전편에도 “적을 죽이려는 자는 부하들로 하여금 적개심을 품게 하라 殺敵者 怒也.”라는 말이 있다.

애병필승(哀兵必勝)은 ‘비분에 차 있는 병사들이 반드시 싸움에서 승리한다.’라는 말로, 전쟁 중인 양방의 전력이 대등할 때는 비분에 차 있는 쪽이 전력을 다해 싸움으로써 반드시 승리를 쟁취한다는 뜻이다. 반의어는 교병필패(驕兵必敗:교만한 병사는 반드시 패배한다)이다.


여병말마 (厲兵秣馬 숫돌 려, 병장기 병, 말먹이 말, 말 마)

이 고사는 좌씨전의 희공(僖公) 33년 조에 실려 있다.

춘추시대의 진(秦)나라 목공은 진(晉)나라 문공과 연합하여 정나라를 공격하였다.

정나라 문공은 대부 촉지무를 파견하여 진목공을 설득하였고, 이에 진나라는 대부 기자를 비롯한 일부만 정나라에 남겨두고 철수하였다.

2년 뒤에 기자는 진목공에게 정나라의 상황을 보고하는 밀서를 보내, 정나라의 방비가 허술하며 자신들이 북쪽 성문을 장악하였으니 기습공격을 펼친다면 정나라를 정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알렸다. 진목공은 절호의 기회라 여기며 군대를 이끌고 정나라로 진군하였다.

진나라 군대가 정나라 근처에 이르렀을 때, 현고라는 정나라 상인이 이를 목격하였다. 현고는 짐승 가죽 4장과 소 12마리를 끌고 가서 진나라 군대의 노고를 위로하는 한편, 급히 사람을 보내어 정목공(문공의 아들로 아버지를 이어 즉위함)에게 진나라의 진군 소식을 알렸다. 정목공은 진위를 파악하기 위하여 기자 등이 묵고 있는 숙사로 사람을 보내 동태를 살펴보도록 하였다. 그랬더니 그들은 수레에 실을 짐을 묶어 놓고, 병장기를 갈고 말에게 먹이를 먹이고 있었다 則束載厲兵秣馬矣. 이런 보고를 들은 정목공은 그들이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정목공은 황무자를 기자에게 보내 정나라에서 진나라의 기습 계획을 이미 알고 대비한 것처럼 꾸미게 하였다. 기자 등은 이에 속아 넘어가 계획이 탄로 났다고 여기고는 정나라에서 도망쳤다.

진(秦)나라 군대는 공격을 포기하고 회군하는 길에 진(晉)나라의 기습을 받아 전멸 당하였다.

여기서 유래하여 여병말마(厲兵秣馬)는 ‘병장기를 날카롭게 갈고 말을 먹여 살찌우다.’라는 뜻으로, 전쟁 준비를 다 갖추었음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다.


우직지계 (迂直之計 돌아갈 우, 곧을 직, 의 지, 꾀 계)

손자(孫子) 군쟁편(軍爭篇)에 나오는 이야기다.

"가까운 길을 먼 길인 듯 가는 방법을 적보다 먼저 아는 자가 승리를 거두게 된다 先知迂直之計者勝. 이것이야말로 군대가 전쟁에서 승리하는 원칙이다 此軍爭之法也."

손자는 이 말에 덧붙여 설명하기를 "군쟁(軍爭)의 어려움은 돌아가는 길을 직행하는 길인 듯이 가고 불리한 우환을 이로움으로 만드는 데 있다. 그러므로 그 길은 돌기도 하고, 미끼를 던져 적을 유인하기도 하고, 상대방보다 늦게 출발하고서도 먼저 도달하기도 한다. 이런 사람이 우직지계를 아는 사람이다."

병법의 핵심은 상대의 허점을 알아내고 교란시켜서 적을 오판에 빠뜨리는 것이다. 전쟁사에 남은 수많은 명 전투는 병력으로나 전세로나 월등 열세에 빠진 쪽이 어떻게 해서 이겼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힘과 지혜의 싸움인 전쟁에서 우직지계는 상식적인 사고를 뒤집어 생각해보는 것이 병법의 기초임을 말한다. 여기서 유래한 우직지계(迂直之計)는 가까운 길을 곧게만 가는 것이 아니라 돌아갈 줄도 알아야 한다는 병법의 지혜를 일컫는다.


이도살삼사 (二桃殺三士 두 이, 복숭아 도, 죽일 살, 석 삼, 무사 사)

안자춘추(晏子春秋) 간(諫) 하(下)의 이야기다.

제(齊)나라 경공에게는 신변을 호위하는 장수로 공손접, 고야자, 전개강 세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힘과 공을 빌어, 법과 위계질서를 무시했다. 참다못한 재상 안영이 이들을 제거하기 위한 계획을 짰다.

어느 날 안영이 만찬석상에서 복숭아 두 개를 내어 와 경공에게 바치며, “이 복숭아를 가장 공로가 큰 신하에게 상으로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먼저 공손접이 나서서 “사냥 때, 폐하께 달려드는 호랑이를 내가 맨손으로 잡았다.”하고는 복숭아를 하나 가졌다. 전개강 역시 “나는 매복을 사용하여 두 번이나 적을 무찔렀다.”하고는 남은 복숭아를 가졌다. 당황한 고야자가 “폐하를 모시고 황허강을 건널 때, 폐하 수레의 왼쪽 말이 중류로 도망쳤다. 내가 강으로 들어가 백 걸음 동안 흐름을 거스른 다음 흐름을 좇아 90리를 가서 말을 죽였다. 그런 다음 왼손으로 말의 엉덩이를 붙잡고 오른손으로 말의 목을 들어 언덕으로 올라왔다.”하고 큰소리로 말했다.

공손접과 전개강이 이 말을 듣고 “우리의 공훈은 그대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런데도 복숭아를 탐한 것은 우리의 탐욕 때문이다.”하고는 스스로 목을 베었다.

고야자도 “두 사람이 죽었는데 나 혼자 사는 것은 인(仁)이 아니다. 사람이 명성을 자랑하고 있는 것을 듣고 부끄럽게 여기는 것은 의롭지 못하다.”하고 칼을 뽑아 자기의 목을 찔렀다.

고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제갈 량의 양보음(梁甫吟)이라는 고체시(古體詩)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노래하였다.

‘하루아침에 참언을 입어(一朝被讒言), 두 복숭아가 세 장사를 죽였다(二桃殺三士).’

이백 또한 동명의 시를 지어 이 고사를 더욱 유명하게 하였다.

‘제나라의 재상은 힘이 남산을 갈아엎는 세 명의 장사를 죽이는데, 두 개의 복숭아를 사용하였다 力排南山三壯士 齊相殺之費二桃.’

안영의 생각은 현대인의 사고방식과 유사하다. 자신을 따르지 않는 자, 집단의 질서를 흩트리는 자, 장차 자신을 위해할 염려가 있는 자 등에게는 인정을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여기서 유래한 이도살삼사(二桃殺三士)는 복숭아 두 개로 무사 세 명을 죽인다는 뜻으로, 교묘한 책략으로 상대를 자멸하게 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이우위직 (以迂爲直 써 이, 굽을 우, 할 위, 곧을 직)

손자의 군쟁(軍爭)편에 “무릇 용병의 방법은 장수가 군주의 명령을 받아 군대를 편성하고 적과 대치하여 주둔한다. 적보다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기 위하여 경쟁하는 것보다 어려운 일은 없는데, 이는 우회함으로써 곧장 가는 것과 같은 효과를 얻고, 아군의 불리한 여건을 이로움이 되도록 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以迂爲直 以患爲利. 그러므로 그 길을 우회함으로써 적으로 하여금 자신이 유리하다고 판단하게 하고, 적보다 나중에 출발하여 먼저 도달하는 것을 우직(迂直)의 전략을 안다고 한다.”라고 하였다.

아군이 멀리 우회하는 것처럼 적을 속임으로써 적이 기동을 지체하도록 유인하면 적보다 늦게 출동하여도 먼저 도착하여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다. 이것이 우회함으로써 곧장 가는 것과 같은 효과를 얻는다는 뜻이다.

이러한 우회작전의 예로는 암도진창(暗渡陳倉)의 고사(故事)에서 한신(韓信)이 잔도를 수리하는 척하여 초나라 장수 장한(章邯)을 속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군을 이끌고 우회하여 진창을 점령하고 관중을 함락시킨 일을 들 수 있다.

여기서 유래한 이우위직(以迂爲直)은 ‘굽은 것으로써 바른 것이 되게 하다.’라는 뜻으로, 우회함으로써 곧장 가는 것과 같은 효과를 거두는 전략을 말한다.


이정대화 (以靜待譁 써 이, 고요할 정, 기다릴 대, 시끄러울 화)

손자의 군쟁(軍爭)편에 ‘아군의 태세를 잘 정비하여 적이 혼란스러워지기를 기다리고, 아군의 태세를 침착하게 가다듬어 적이 시끄러워지기를 기다리니, 이것이 심리를 다스리는 방법이다 以治待亂 以靜待譁 此治心者也.’라고 하였다.

싸워서 이길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은 여유가 있어 시끄럽지 않다. 반면에 마음이 불안하면 조급해지고, 조급해지면 시끄럽고 말이 많아지기 마련이다. 따라서 아군의 태세를 침착하게 가다듬고 나서 적이 조급해질 때를 기다려 그 불안정한 약점을 공격하면 승리를 취할 수 있다는 말이다. 여기서 유래한 이정대화(以靜待譁)는 ‘고요함으로써 시끄러워지기를 기다린다.’라는 뜻으로, 아군의 태세를 침착하게 가다듬고 나서 들뜨고 조급해진 적을 상대하라는 전략을 말한다.


이치대란 (以治待亂 써 이, 다스릴 치, 기다릴 대, 어지러울 란)

손자의 군쟁(軍爭) 편은 적과 싸울 때의 용병술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전투태세를 잘 갖추고 있는 적군과는 정면으로 대결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병사들의 사기는 아침에는 날카롭고, 낮에는 나태해지며, 저녁에는 돌아갈 생각만 한다. 그러므로 용병을 잘 하는 자는 상대의 날카로운 기세를 피하고 적이 나태해질 때 공격하니, 이것이 사기를 다스리는 방법이다. 아군의 태세를 잘 정비하여 적이 혼란스러워지기를 기다리고, 아군의 태세를 침착하게 가다듬어 적이 시끄러워지기를 기다리니, 이것이 심리를 다스리는 방법이다 以治待亂, 以靜待譁, 此治心者也.’

가까운 곳에서 먼 길을 오는 적을 기다리고, 편안한 자세로 적이 피로해지기를 기다리며, 배불리 먹고 나서 적이 배고프기를 기다리니, 이것이 힘을 다스리는 방법이다. 적의 깃발이 질서정연하면 이를 맞이하여 싸우지 않으며, 적진의 기세가 당당할 때는 공격하지 않으니, 이것이 변화에 잘 대처하는 방법이다." 손자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선책이라고 하였으나, 싸우게 된 경우에는 지략(智略)을 써서 아군의 병력을 손상시키지 않고 적을 제압하는 것이 온전한 승리라고 하였다. 아군의 전력을 잘 정비하고 나서 상대가 나태해지기를 기다려 공격하는 것도 그러한 용병술 가운데 하나이다.

이치대란은 뒷 구절의 이정대화(以靜待譁)와 상응하여 적이 혼란스러워지고 동요하기를 기다려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적을 제압하는 용병의 방법이며, 또한 일상생활에서 경쟁자에 대처하는 방법으로도 통용된다.

여기서 유래한 이치대란(以治待亂)은 ‘자신을 다스린 뒤에 상대가 어지러워지기를 기다린다.’라는 뜻으로, 아군의 태세를 잘 정비하고 나서 적군이 혼란스러워지기를 기다려 대적한다는 말이다.


이호경식계 (二虎競食計 두 이, 범 호, 다툴 경, 먹을 꾀 계)

사기의 장의열전(張儀列傳)에 변장자가 두 마리의 호랑이를 잡은 이야기가 나온다.

변장자가 호랑이를 찌르려고 할 때에 그가 묵고 있던 여관에서 심부름하는 아이가 말리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두 호랑이가 소를 잡아먹으려고 하는데, 고기를 먹어 보고 맛이 있으면 반드시 서로 다툴 것이고, 다투게 되면 반드시 싸울 것이며, 싸우게 되면 큰 놈은 다치고 작은 놈은 죽을 것이니, 다친 놈을 찌르면 단번에 두 마리 호랑이를 잡았다는 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변장자가 그 말을 따라 기다리니, 과연 두 마리 호랑이가 싸워 큰 놈은 다치고 작은 놈은 죽었다. 변장자는 다친 놈을 칼로 찔러 단번에 두 마리의 호랑이를 잡는 성과를 거두었다.

또 삼국지연의에서도 이 계책이 언급된다.

여포가 서주에 주둔한 유비에게 몸을 의탁하자, 조조는 두 사람이 힘을 합쳐 자신을 공격해올 것을 두려워하였다. 이에 순욱은 무력을 쓰기보다는 유비와 여포가 서로 싸우게 하는 계책을 써야 한다고 말하였다.

"황제에게 청하여 유비를 서주목으로 임명하게 하고, 여포를 제거하라는 밀서를 내리십시오. 유비가 여포를 제거하면 유비는 한쪽 팔을 잃는 셈이 되어 처치하기 쉬워질 것입니다. 유비가 여포를 제거하지 못하면 여포가 반드시 유비를 죽일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두 마리 호랑이가 먹이를 두고 다투게 만드는 계책입니다(此乃二虎競食之計也)." 그러나 유비는 이 계책에 말려들지 않고 오히려 밀서를 여포에게 보여주었다. 이렇게 볼 때, 이호경식계는 상대방의 사이를 이간하는 이간계(離間計)에 속하며, 남의 칼을 빌려 사람을 죽이는 차도살인지계(借刀殺人計)와도 비슷하다.

여기서 유래한 이호경식계(二虎競食計)는 ‘두 마리 호랑이가 먹이를 다투도록 만드는 계책’ 이라는 뜻으로, 대적하는 상대의 갈등을 조장하여 서로 싸우게 함으로써 이득을 취하는 계책을 말한다. 이호경식지계(二虎競食之計)라고도 한다.


일고작기 (一鼓作氣 한 일, 북 고, 지을 작, 기운 기)

좌씨전의 '장공 10년' 조에서 유래되었다.

춘추시대에 제(齊)나라가 맹약을 어기고 노(魯)나라를 공격하였다. 노나라 장공은 조귀와 전차를 같이 타고 장작이라는 곳에서 제나라 군대와 교전하였다.

장공이 북을 두드려 진격할 채비를 하자 조귀는 아직 이르다고 말렸다.

제나라 군대가 북을 세 번 두드리고 나서야 조귀는 “이제 공격해도 되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노나라 군대가 북을 한 번 두드리자 병사들이 사기가 올라 모두들 용감하게 전진하였다. 제나라 군대는 그 기세를 당해내지 못하고 대패하여 도주하였다. 장공은 승세를 틈타 적을 추격하려 하였으나 조귀가 다시 말렸다. 조귀는 전차에서 내려 제나라 군대의 전차가 지나간 바퀴자국을 자세히 살펴보고, 다시 전차에 올라 멀리 제나라 군대가 도주하는 상황을 살펴보고 나서야 “이제 추격해도 됩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노나라 군대는 제나라 군대를 몰아내고 승리하였다. 장공이 조귀에게 그렇게 한 까닭을 묻자, 조귀는 이렇게 말하였다.

“무릇 전쟁이란 사기(士氣)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사기는 북을 처음 울릴 때 가장 왕성하고, 두 번째 울릴 때면 조금 쇠퇴해지며, 세 번째 울릴 때면 이미 사그러들고 맙니다. 적군은 북을 세 번 두드려 사기가 사그러들고 아군은 첫 번째 북을 울려 사기가 왕성하였으므로 이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夫戰, 勇氣也. 一鼓作氣, 再而衰, 三而竭. 彼竭我盈, 故克之. 그러나 제나라와 같은 대국은 그 용병술을 예측하기 어려워 혹시 매복이 있지나 않을까 염려하여 살펴보았는데, 도망친 바퀴자국이 어지럽고 깃발도 거꾸러뜨린 채 도주하는 모습을 보고 패주하는 것이 틀림없다고 판단되어 추격해도 좋다고 한 것입니다.”

여기서 유래한 일고작기(一鼓作氣)는 ‘한 번 북을 두드려 사기를 진작시키다.’라는 뜻으로, 전장에서 첫 북소리로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것처럼 처음에 기세를 올려 단숨에 일을 처리하는 것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다.


좌향기리 (坐享其利 앉을 좌, 누릴 향, 그 기, 이로울 리)

중국의 병법서인 병경백자(兵經百字)의 연부(衍部)편에 ‘내가 조치하기 어려운 일은 남의 손을 빌릴 것이니, 반드시 몸소 행하지 않아도 앉아서 그 이익을 누릴 수 있다 己所難措 假手於人 不必親行 坐享其利.’라는 말이 있다.

자신의 병력이나 물자를 동원하지 않고 적을 이용하여 힘들이지 않고 군사적 이득을 취한다는 뜻이다. 손자의 작전편에도 ‘군대를 잘 운용하는 자는 한 사람에게 두 번 군역을 징집하지 않고, 군량미를 세 번 실어 보급하지 않으며, 필요한 것은 적국에서 취하여 이용하고 적국의 식량을 군량미로 조달하므로 군대의 식량이 풍족할 수 있다.’라고 하였으니, 적을 이용하여 이득을 취한다는 의미는 같다.

좌향기리(坐享其利)는 ‘앉아서 이익을 누린다.’라는 뜻으로, 자신이 직접 나서지 않고 상대방을 이용하여 이득을 취하는 병법의 계책으로, 적을 이용한다는 점에서는 차도살인(借刀殺人:남의 칼을 빌려 사람을 죽임)의 계책과 비슷하며, 힘들이지 않고 이득을 취한다는 점에는 어부지리(漁父之利:둘이 다투고 있는 사이에 엉뚱한 사람이 이익을 취함)와 의미가 비슷하다.


지피지기백전불태 (知彼知己百戰不殆 알 지, 저 피, 알 지, 몸. 자기 기, 일백 백, 싸울 전, 아닐 불, 위태할 태)

손자(孫子) 모공편(謀攻篇)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지피지기 백전불퇴 知彼知己 百戰不殆 : 적과 아군의 실정을 잘 비교 검토한 후 승산이 있을 때 싸운다면 백 번을 싸워도 결코 위태롭지 않다.

부지피이지기 일승일패 不知彼而知己 一勝一負 : 적의 실정을 모른 채 아군의 전력만 알고 싸운다면 승패의 확률은 반반이다.

부지피부지기 매전필패 不知彼不知己 每戰必敗 : 적의 실정은 물론 아군의 전력까지 모르고 싸운다면 싸울 때마다 반드시 패한다.

손자는 전국시대에 편찬된 병가의 서적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당연히 전쟁에 이기기 위한 전술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손자는, 싸움터에서 군대의 세력을 전개시켜서 피로 물든 전투를 한 뒤에 적을 이기는 것은 전술가로서 하급[下之下]이라고 말한다. 즉 싸우지 않고서 이기는 것, 이것이 손자가 이상으로 하는 전략이다.

따라서 손자는 시계편(始計篇)에는 무모한 전쟁에 대한 경계를 이야기하였으며, 작전편(作戰篇)에는 전쟁이 국가와 백성들에게 주는 막대한 손실과 함께 부득이하게 전쟁을 할 경우 되도록 빨리 끝내야 할 필요성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모공편은 적군에게 이기는 방법, 즉 여러 가지 승리의 방법이 적혀 있다. 그 중 최선의 승리는 아군의 피해가 전혀 없는, 싸우지 않고 승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계략으로 적군의 전의(戰意)를 꺾어야 할 것을 지적하였다.

손자는 결코 백전백승(百戰百勝)이라는 것을 상책으로 삼지 않았다. 백 번 싸워 백 번 이기는 것은 상의 상책이 아니다. 싸우지 않고서 적의 군대를 굴복시키는 것이 상의 상책이다. 그러므로 으뜸가는 군대는 계략으로 적을 친다. 그 다음가는 군대는 서로 친다. 또 그 다음가는 군대는 적병을 치며, 그 아래의 군대는 성을 공격한다 百戰百勝 非善之善者也 不戰而屈人之兵 善之善者也 故上兵伐謀 其次伐交 其次伐兵 其下攻城.

‘으뜸가는 군대는 계략으로 적을 친다.’는 것은, 최상의 전쟁 방법을 말한다. 이것은 계략으로,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키는 것이다.

‘서로를 친다.’는 것은 차선책으로서, 상대편의 동맹국으로 하여금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게 하는 것이다. 즉, 상대편을 고립시켜 원조가 없는 상황으로 모는 방법이다.

그 다음이 싸움터에서 적과 대결하는 일이다. 그러나 상대편에게도 전략과 계략이 있으므로, 항상 최선의 방법을 쓸 수는 없다. 왜냐하면, 상의 상책인 사람이 아닌 이상 백전백승의 길만을 생각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피아(彼我)를 잘 비교 검토한 다음에 전투에 임할 것을 권하고 있다. 여기서 지피지기를 위한 구체적인 방법은 간첩(間諜)의 이용이다.

중국 역사상 누구보다도 먼저 간첩의 중요성을 역설한 이가 바로 손자다.

손자가 말한 대로 싸우지 않고 이기기 위해서는 먼저 지피를 하여야 하는데, 이 지피는 적에 대한 정보가 필수다. 따라서 상대편에 대한 정보의 입수를 위해서는 간첩의 활용이 우선이다.

용간편(用間篇)에는 이 간첩에 대한 이야기가 전문적으로 다루어져 있다.

손자가 말하는 간첩에는 향간(鄕間), 내간(內間), 반간(反間), 사간(死間), 생간(生間)의 다섯 종류가 있다.

향간은 상대국의 주민을 고용하는 것이며, 내간은 관리를 고용하는 것이다. 현대의 고정 간첩과 같은 개념이다.

그리고 반간은 일종의 이중간첩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역정보를 흘리기 위해 이용한다.

사간은 반간보다 조금 더 복잡한 것으로 배반할 가능성이 있는 간첩이다. 그에게 거짓 정보를 주어 상대국에 보고하도록 하며, 이로 인해 적의 손에 처형되도록 한다.

끝으로 생간은 상대국의 정보를 탐지한 뒤에 살아 돌아와 상세하게 보고할 수 있는 간첩을 말한다. 제일 중요한 간첩이다.

여기서 유래한 지피지기백전불태(知彼知己百戰不殆)는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뜻으로, 상대편과 나의 약점과 강점을 충분히 알고 승산이 있을 때 싸움에 임하면 이길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요즘 많은 사람이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 ; 백 번을 싸워도 결코 위태롭지 않다)를 지피지기 백전백승(知彼知己 百戰百勝 ; 백 번을 싸워 백번을 이긴다)으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이 구절의 가장 핵심은 안다는 것인데, 예를 들면 내가 적 보다 모든 면에서(군대의 세력과 사기, 전략과 전략을 베푸는 모사 등)약하고 그 사실을 정확히 안다면, 싸우는 것이 아니라 화해하거나 피해야 위태롭지 않다는, 곧 살길이란 뜻이다.


타초경사 (打草驚蛇 칠 타, 풀 초, 놀랄 경, 뱀 사)

다음은 중국 당나라 단성식의 수필집인 유양잡조(酉陽雜俎)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당나라 때 지방의 한 탐관오리 현령이 온갖 명목으로 세금을 거둬들여 사복을 채우자, 견디다 못한 백성들은 일부러 현령에게 그 부하들의 부정부패 사실을 일일이 열거해 고발장을 올렸다.

그러자 고발장을 읽어보던 현령은 깜짝 놀라며 여수타초 오이경사(汝雖打草 吾已驚蛇)라는 글귀를 적어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고 한다. 즉 너희들이 비록 풀밭을 건드렸지만 이미 나는 놀란 뱀과 같다. 라는 뜻으로, 이것은 백성들이 자기 부하들의 비리를 고발한 것은 곧 우회적으로 자신의 비리를 고발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지레 겁을 먹은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을을 징계해서 갑을 각성하게 하려 한 백성들의 의도는 충분히 달성되었다.

병법 36계에 나오는 '타초경사'는 숨어 있는 뱀을 잡기 위해서는 자기 스스로 놀라는 척하며 풀밭을 두드려 뱀이 놀라서 나오게 하려는 계책이다. 즉, 변죽을 울려 적의 정체를 드러나게 함을 비유하는 말이다.

중국의 마오쩌둥은 반공사조(反共思潮) 완화정책으로 명방운동(鳴放運動)을 펴, 지식인과 학생들이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발표할 수 있도록 보장해 준다고 선포했다.

이 명방운동은 '온갖 꽃이 같이 피고 많은 사람들이 각기 주장을 편다.'는 '백화제방 백가쟁명(百花齊放 百家爭鳴)'이란 구호로 표현되었다.

중국공산당은 또 '말한 자는 죄가 없고 들은 자는 반성해야 한다.' 며, 온 국민이 공산당 숙당운동(肅黨運動)을 도와줄 것을 제기했다. 즉, 잘못이 있다고 생각되면 지위고하를 불문하고 과감히 비판하라고 했다. 이에 따라 지식인들이 공산당을 소리 높여 비판하자, 마오쩌둥은 윤곽이 드러난 지식인들을 즉시 체포하고 정풍운동(整風運動)이란 명분 아래 줄줄이 숙청해 버렸다. 마오쩌둥은 뱀으로 비유되는 지식인들을 동굴로부터 끌어내기 위해 백화제방과 백가쟁명이라는 미끼를 던졌던 것이다.

여기서 유래한 타초경사(打草驚蛇)는 풀을 두드려 뱀을 놀라게 한다는 뜻으로, 을(乙)을 징계하여 갑(甲)을 깨우침을 비유하거나 또는 변죽을 울려 적의 정체를 드러나게 하거나 공연히 문제를 일으켜 화를 자초함을 비유한 말이다.


풍림화산 (風林火山 바람 풍, 수풀 림, 불 화, 뫼 산)

손자의 군쟁(軍爭)편은 전쟁에서 기선을 제압하여 승리를 취하는 방법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 그 가운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병법은 적을 속여 세우고 이익에 따라 움직이며, 병력을 나누기도 하고 합치기도 함으로써 변화를 꾀한다. 그러므로 군사를 움직일 때는 질풍처럼 날쌔게 하고, 나아가지 않을 때는 숲처럼 고요하게 있고, 적을 치고 빼앗을 때는 불이 번지듯이 맹렬하게 하고, 적의 공격으로부터 지킬 때는 산처럼 묵직하게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 故其疾如風 其徐如林 侵掠如火 不動如山. 숨을 때는 검은 구름에 가려서 별이 보이지 않듯이 하되, 일단 군사를 움직이면 벼락이 치듯이 신속하게 해야 한다. 우회하여 공격할 것인지 곧바로 공격할 것인지를 먼저 아는 자가 승리할 것이니, 이것이 군사를 가지고 싸우는 방법이다.’

이러한 전술을 전투에서 적극적으로 응용한 사람이 일본 전국시대의 무장 다케다 신겐이다.

그는 이 전술에 감명을 받아 '풍', '림', '화', '산'을 한 글자씩 장식한 군기(軍旗)를 만들었으며, 이후 풍림화산은 그의 군대를 상징하는 말이 되었다. 신겐은 병으로 죽을 때까지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였으며, 타격을 입을 만한 패배는 당하지 않았다고 한다.

여기서 유래한 풍림화산(風林火山)은 '바람처럼 빠르게, 숲처럼 고요하게, 불길처럼 맹렬하게, 산처럼 묵직하게'라는 뜻으로, 병법에서 상황에 따라 군사를 적절하게 운용하여야 승리를 거둘 수 있다는 말이다.


풍성학려 (風聲鶴唳 바람 풍, 소리 성, 학 학, 울 려)

진서(晉書)의 사현재기(謝玄載記)에 다음의 이야기가 나온다.

동진 효무제 때에 전진(前秦)의 3대 임금인 부견이 100만 대군을 이끌고 동진을 공격해왔다. 동진에서는 재상 사안이 동생 사석과 조카 사현에게 8만의 군사를 주고 나가 싸우게 했다. 양쪽 군대는 회수(淮水)와 비수가 만나는 수양에서 대치하고 있었는데, 부견은 동진의 진영이 질서가 정연하고 병사들이 용감한 것을 보고 휘하의 제장(諸將)에게 “전군을 약간 후퇴시켰다가 적군이 강 한복판에 이르렀을 때 돌아서서 반격을 가하라.” 고 명령했다. 그러나 이는 부견의 오산이었다. 일단 후퇴 길에 오른 전진군은 반격은 커녕 멈추어 설 수조차 없었다. 후퇴를 개시하고 선봉군이 강을 건너 되돌아오기 시작하자, 후미의 전진군은 선봉군이 싸움에 패해 물러나는 것으로 오인하고 앞을 다투어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무사히 강을 건넌 동진군은 사정없이 전진군을 들이치니, 대혼란에 빠진 전진군은 아군이 적군으로 보이는 혼란 속에 서로 짓밟으며 달아나다 물에 빠져 죽는 자가 부지기수였다. 겨우 목숨을 건진 남은 군사들은 갑옷을 벗어던지고 밤을 새워 달아났는데, 얼마나 겁에 질렸던지 ‘바람소리와 학의 울음소리 風聲鶴唳’만 들려도 동진의 군사가 뒤쫓아 온 줄 알고 도망가기 바빴다 한다.

‘풍성학려’가 청각적인 착각이라면, 적을 두려워한 나머지 온 산의 초목까지도 모두 적군으로 보인다는 뜻의 초목개병(草木皆兵)이라는 말은 시각적인 착각을 말하는 것으로, 같은 고사에서 비롯된 말이다.

여기서 우래한 풍성학려(風聲鶴唳)는 ‘바람소리와 학의 울음소리’라는 뜻으로, 겁을 먹은 사람이 하찮은 일이나 작은 소리에도 몹시 놀람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합종연횡 (合縱連橫 합할 합, 세로 종, 이을 련, 가로 횡)

전국시대 중반(B.C 300년대 초반) 전국칠웅이 자리를 잡으며 패권을 다퉜다. 이 과정에서 상앙변법을 통해 강국으로 부상한 진나라 혜문왕이 각 제후국에 땅을 요구하며 동진을 추진해 독보적으로 나선다. 이때 주나라에 귀곡선생의 수제자 중 소진과 장의 두 희대의 유세가가 나왔는데, 먼저 소진은 자신의 유세술을 펼치기 위해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각국을 돌아다녔다.

처음엔 주나라 현왕을 알현하고 진혜문왕에게는 아버지 효공 때 상앙 같은 유세가의 무소불위를 봤기에 무시당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귀곡선생이 준 태공음부편(太公陰符篇)을 절차탁마해 유세술에 눈을 뜨고는 조나라 숙후를 찾아갔으나 정승 봉양군에게 퇴자 맞고, 다시 연나라 문공에게 의탁하여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는다.

이후 조나라 숙후를 다시 찾아가 6국이 연합해서 진(秦)에 맞서야 한다는 합종책을 내놓으며 각국을 돌아다니며 연합시켰다. 그때 그의 권세는 6국의 재상을 지낼 만큼 주나라의 왕권을 능가했다. 아뭏든 합종책이 진을 견제하며 빛을 보는가 했는데, 이때 소진과 동문수학했던 장의도 출사해서 유세술을 펼치려고 위나라 혜왕을 찾아갔다가 퇴자 맞고 초나라 위왕에게 의탁하다가 영윤 소양에게서 화씨벽을 훔친 주범으로 오해받아 치도곤을 맞았다. 하지만 입만은 살아서 다행이라며 부인에게 자랑을 했다한다.

이후 조나라에 있던 친구 소진을 찾아가서 도움을 받으려다 겉으로는 문전박대를 당했으나, 소진의 숨은 배려로 진(秦)혜문왕이 장의를 알아보고 능력을 인정받아 재상으로 올랐다.

진(秦)혜문왕에게 인정받은 능력은 6국을 이간질시켜 띄어 놓아 진나라에 속국으로 붙게 하는 것으로, 그래서 그는 소진이 제시한 합종책을 깨기 위해 첫 번째로 위나라와 연나라를 포섭(연나라 세자와 결혼)해서 진나라를 받는 것이 유리하다고 꾀어 위나라에서도 재상직을 하여 진나라와 겸직한다. 이때부터 합종의 6국은 와해되기 시작되고 소진은 장의의 꾀로 진나라에 붙은 연나라를 책망하러 갔다가 도리어 연나라 왕에게 그러면 제나라가 우릴 침범한 일은 어쩌겠냐며 책망 받는다. 이에 소진은 연역왕의 어머니 문부인과 사통해 일부러 죄를 짓고 제나라로 도망가서 제선왕을 보필하며 눌러 지낸다.

이로써 소진은 장의의 연횡책에 위기감을 느껴 위, 조, 한, 초, 연 5개국 합종을 추진해 초회왕이 맹주로 추대되어 진나라를 공격했으나, 다들 동상이몽인지라 함곡관에서 대패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여기서 제나라가 빠졌는데 그 이유는 선왕에 뒤를 이은 제나라 민왕은 맹상군의 언질로 일부러 늦게 합류해 합종 대열에서 한발자국 빼었기 때문이다.

제나라는 안정감을 찾게 되고 제선왕 시절 잘나가던 소진의 세력은 꺾이며, 제민왕이 맹상군을 더욱더 중용하니, 합종의 실의 없음과 무용함을 들어 소진을 궁지로 내몰아 대부들이 자객을 시켜 암살시켰다. 이렇게 소진은 연나라를 위해 제나라를 출분했다가 최후의 말로를 맞은 것이다. 한편 위나라 정승으로 있던 장의는 육국이 진나라를 치는데 성공하지 못한 것을 보면서 소진까지 죽자 더욱더 의기양양해 위 애왕을 설파해 진나라와 우호관계를 맺게 하고 다시 진나라로 복귀한다. 이때 연나라는 공자 자지(子之)의 반란이 있었는데 이것을 제민왕이 평정하며 위세를 떨치자 종묘사직이 거들 나버린 연나라는 연소왕이 권좌에 올라 나라를 다시 세우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며 인재들을 모으기 시작한다. 여기서 악의가 등장한다.

한편 합종이 사라진 종국에는 초, 제, 진 삼국이 강국으로 부상되며 서로 암중모색했다.

여기서 장의가 또다시 나서서 제나라와 두터운 친교를 맺었던 초나라 회왕을 두 번이나 속여서 제나라와 절교하면 진나라의 땅을 떼어주겠다는 장의의 계략에 속아 넘어가 분통해하고 장의를 잡았다가 다시 풀어줬다.

장의는 진나라를 위해서 두 나라를 이간질 시켜 초와 진이 통혼관계(회왕과 혜문왕이 서로의 딸을 시집보냄)를 맺어 동맹을 하게한다. 하지만 이때 제민왕이 그 사이 회왕이 진과 붙었다고 화가나서 회왕을 치니 그는 겁을 먹고 세자 횡(초경양왕)을 제나라에 볼모로 보내어 화친했다.

이에 이번에는 진소양 왕이 분통해하며 초나라 군대를 대패시키고, 초회왕을 사로잡기 위해서 빼앗은 땅을 돌려준다고 꼬여 대장 백기와 몽오를 출전시켜 진나라 함양 땅으로 오게 만든다. 이 과정에서 초나라 대신 굴원과 소저는 극구 만류했지만 가야된다는 근상과 공자 난을 데리고 적지로 들어가 함양 땅에서 볼모로 잡히게 되었다. 이때 초나라에서는 왕위가 비었다 해서 곧바로 제나라에 볼모로 잡혀있는 세자횡을 데려와 앉히니 그가 바로 초의 경양왕이다.

초회왕은 이렇게 제와 진에 굴욕을 당하며 볼모생활 중 도망치다 다시 잡혀와 분통해하며 피를 한말이나 쏟고 죽었는데, 이는 예전의 춘추말 진(晉)과 초가 동맹하던 시기에 두 곳에 붙으려던 정나라의 정간공과 같은 형세다. 이렇게 초회 왕이 죽게 되자 제와 동맹해서 강국인 진나라에 대항해야 한다는 합종파였던 충신인 대부 굴원은 진나라의 장의와 내통한 초경양 왕의 근신이던 정적 공자 난과, 간신 근상과, 왕의 애첩 때문에 삭탈관직 당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종묘사직을 달래다, 초나라의 국세가 기울고 조정에는 간신들만 득세하는 상황을 한탄하고 슬퍼하다가 멱라수에 몸을 던져 자결하였다. 그가 바로 초나라의 대신이자 애국시인으로 이름난 굴평이고 자는 원으로 회왕과 경양왕 2대에 결처 봉직하면서 주로 회왕을 섬겨 좌도(左徒)의 중책을 맡아 내정과 외교에서 활약했으며 학식과 문장이 뛰어나서 시경(詩經과 함께 중국 고대의 2대 시가집이라고 하는 초사(楚辭)의 저자다. 이런 그의 충절을 기려 후세에 5월 5일 멱라수에는 경도희(競渡戱 :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 경주, 누가 굴원의 시체를 빨리 건져오나 내기하는 의미)라는 행사와 제사를 지낸다.

‘사당은 강가에 우뚝 섰는데 충렬왕에게 바치는 향불이 그칠 때가 없더라. 그 후 간신들의 뼈는 어디서 썩었는지 모르지만 백성들은 해마다 그날이 되면 배를 타고 충신을 조상하는 도다.’

이렇게 장의의 세치 혀는 얼빠진 초회왕을 갖고 놀고 충신까지 죽이며 초나라를 위기에 빠뜨렸다. 합종의 소진보다 더 간교하고 뛰어나서 진나라를 중심으로 6국이 때에 따라 동맹관계를 맺게 해서, 지난날 소진이 이루었던 육국의 합종을 분리시키는데 성공했다. 이 후에 연횡정책의 중심에 서 있던 진혜문왕이 죽고 세자 탕이 계승하니 그가 바로 진무왕으로 이 왕은 용사 임비와 맹분을 데리고 주나라에 가서 용력을 자랑하려고 구룡신정을 드는 차력시범을 보이다가 놓쳐서 발목이 찍혀 병사했다.

진무왕이 그렇게 죽기 전 권세와 대신들의 반발의 위협을 느낀 장의는 스스로 실각함을 비치며, 때 마침 제민왕 침입의 눈을 돌린다며 위나라 애왕에게 출분해 정승으로 지내다 1년 뒤 병사하여, 소진의 최후와는 비교된다. 종국엔 장의의 연횡책은 실질적인 힘을 가진 진을 중심으로 했기에, 합종보다 더 현실적이며 안정성과 효율성을 지녀서 후에 진나라가 전국을 통일하는데 밑거름이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합종연횡(合縱連橫) 주나라 소진은 강국인 진나라를 대하여 약소국인 6개국이 연합하는 ‘합종’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장의는 현실적으로 약소국은 진나라 밑에 들어가야 살 수 있다는 속국론인 ‘연횡’을 주장했다.

* 합종책 : 전국시대, 강국인 진나라에 대항하기 위한 6국 동맹책.

연횡책 : 6국이 개별적으로 진나라를 상국으로 섬기게 하는 정책.

귀곡자 : 전국시대의 모사로 종횡가(縱橫家)를 이뤘다 하나 성명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으며, 제반 지식에 통달했다고 한다. 그가 숨어살던 귀곡(산서성 내)이란 지명을 따서 호를 삼고 종횡설의 법(法)을 적은 귀곡자(鬼谷子) 3권을 지었다고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허장성세 (虛張聲勢 빌 허, 베풀 장, 소리 성, 기세 세)

진(晉)나라 장수인 위주와 선진이 위(魏)나라에 있는 오록성으로 쳐들어갔다.

이때 선진은 군사들에게 군대 안에서 쓰는 기인 기치(旗幟)를 많이 들고 산이나 언덕을 지나갈 때마다 기를 꽂으라고 하였는데, 숲에는 수없이 많은 기치가 나부꼈다.

위주가 ‘군사는 적진을 향해 소리 없이 쳐들어가야 하는데, 이렇게 많은 기치를 꽂아 두어 적이 미리 방어하게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라고 하자, 선진은 곳곳에 기치를 많이 꽂아서 늘 강대국의 침략에 대해 근심하고 있는 약소국가인 위나라 백성들에게 우리 군대에 대한 위압감을 갖도록 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진(晉)나라 군사가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은 위나라 백성들이 성 위에 올라가보니 진나라의 기치가 온 산과 언덕에 셀 수 없이 펄럭이고 있었다. 위나라 백성들은 두려움에 떨면서 달아났고 오록성의 관리들도 이 백성들을 막을 수 없었다. 진나라 군사가 오록성에 이르자 성을 지키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선진은 무사히 오록성을 함락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유래한 허장성세(虛張聲勢)는 ‘비어 있고 과장된 형세로 소리를 낸다.’는 뜻으로, 약하지만 강한 것처럼 가장하여 실속은 없으면서 큰소리를 치거나 헛소문과 허세로 떠벌린다는 말이다. 실제로는 얼마 되지 않는데 과장하여 많다고 말한다는 뜻으로 쓰이는 호왈백만(號曰百萬)도 비슷한 말이다.


화우계 (火牛計 불 화, 소 우, 꾀 계)

전국시대 때 제(齊)나라의 전단이 연(燕)나라 군대를 맞아 싸울 때 사용하여 크게 이긴 전법으로, 사기(史記)의 전단열전(田單列傳)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연나라는 소왕의 인재등용정책과 선정으로 국력이 충실해지자, 제나라에 대한 보복을 감행했다. 소왕은 악의를 상장군으로 임명하고 동맹을 맺은 조(趙)·진(秦)·위(魏) 등의 다섯 나라의 군대를 이끌고 제나라를 공략하였다.

제나라 민왕은 군대를 이끌고 맞아 싸웠지만 크게 패하여 제나라 70여 성을 모두 잃고 위나라로 도망갔다. 제나라에는 오직 거와 즉묵의 두 성만 남게 되었다. 마침내 연나라와 동맹을 맺은 네 나라의 군대는 모두 돌아가고, 악의가 이끄는 연나라 군대만이 남아서 이 두 성을 포위하고 항복을 기다리는 대치상태가 3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그러는 동안 연나라에서는 소왕이 죽고 혜왕이 즉위했고, 즉묵에서는 연나라 군대와의 싸움에서 장군이 전사하여 전단(田單)을 새로운 장군으로 삼았다. 전단은 연나라의 혜왕이 악의를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내자, 급히 첩자를 보내 악의를 모함하였다.

혜왕은 전단의 계략에 말려들어 악의를 파면시키고, 기겁(騎劫)으로 교체시켰다. 전단은 다시 첩자를 연나라 군대의 진중으로 보내, 기겁으로 하여금 무모한 짓을 하도록 유도하여 제나라 백성들을 흥분시켰다. 그리하여 연나라의 포로가 되느니 차라리 죽을 때까지 싸우겠다는 생각을 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이어서 전단은 연나라 군대에게 거짓으로 항복하겠다고 사자를 보내자, 연나라 장병들은 승리감에 도취되어 즉묵 편에서 보낸 고기와 술을 마시며 밤늦도록 춤추며 즐겼다.

상황을 이렇게 만든 전단은 미리 성 밑을 파서 적의 진지로 돌격할 수 있도록 지하도를 여러 곳에 만들었다. 그리고 1,000여 마리의 소를 모아 오색의 용을 그린 붉은 비단으로 옷을 만들어 입히고, 양쪽 뿔에 칼을 붙들어 매고 꼬리에는 기름을 묻힌 갈대를 매달았다. 적군이 술에 곯아떨어진 한밤중에 장사 5,000여 명이 칼을 들고 소떼의 뒤를 따라갔다.

적의 진지 가까이 가서 일제히 소의 꼬리에 불을 붙이자, 꼬리가 뜨거워진 소들이 미친 듯이 연나라 진지를 향해 내달렸다. 연나라 군대는 용처럼 생긴 괴물이 칼을 들고 들이닥치자 제대로 대항도 못하고 우왕좌왕하다가 죽거나 다쳤다.

장사 5천 명은 뒤처진 군사들을 처치하며 전진했다. 성 안에서는 북소리와 함성을 질러 사기를 북돋우고, 노인과 아이들은 구리그릇을 때려 소리 내어, 그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연나라 대장 기겁은 전사하고, 연나라 군대는 크게 패해 도망갔다. 마침내 적에게 항복했던 70여 성에서 연나라 군사를 몰아내게 된 것이다.

여기서 유래한 화우계(火牛計)는 쇠뿔에 칼을 잡아매고 꼬리에는 기름을 뿌린 갈대 다발을 매달아 불을 붙인 후, 그 소떼를 적진으로 내모는 전법이다. 화우지계(火牛之計)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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