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은 여성의 성질을 가지고 있고 

보리는 남성의 성질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벼에는 수염이 없으나 

보리는 수염이 있다.


그리고 쌀밥은 부드럽고 감미로와서 먹기가 좋으나 

보리밥은 거칠고 쌀밥처럼 달콤하지 않다.


조물주의 섭리는 참으로 오묘해서 

물과 불은 서로 상극이면서도 

물과 불이 만나지 않고는 아무 것도 이룰 수가 

없게 섭리해 놓았다.


여성과 밭은 화성(火性)이며 

남성과 논은 수성(水性)인데 

남성인 보리는 화성(火性여성)인 밭에서 

생육이 가능하고 

여성인 벼(쌀)는 수성(남성)인 논에서 

생육이 가능하다.


남성은 여성의 밭에서 생존하며 

여성은 남성의 논에서 생존할 수 있음은 

재미있는 현상이다.


이는 곧 남녀간에 서로 다른 이성이 없이는 

정상적인 삶을 할 수 없음을 보여 준다.


또 한가지 흥미있는 것은 여성인 벼(쌀)는 

어릴 때부터 생장한 묘판에 그대로 두면 

벼 구실을 하지 못하므로

반드시 남성의 집인 논으로 옮겨 심어야 하는데 

남성인 보리는 싹이 난 그 자리에서 

옮기지 않고 계속 살아가게 된다.


이들 생태는 여성은 시집을 가서 살아야 

정상적인 여자 구실을 할 수 있고

남성은 생장한 자기 집에서 살아가는 것이 

정상임을 일깨워 준다.


여성들의 가장 큰 비애(悲哀)가 

시집가는 일이라고 할 수 있으나 

이 법칙은 힘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조물의 깊은 뜻(자연법칙)에 의한 

섭리임을 깨달아야 한다.


세상에는 간혹 아들이 없거나 재물이 많으면 

딸자식을 내집에 두고 사위를 맞아들여 

살게 하려는 부모들을 볼 수 있는데

이렇게 되면 딸은 여자의 구실을 할 수가 없으며

사위 또한 남자의 구실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된다.


벼도, 보리도 어릴 때는 꼭 같이 고개를 숙이지 않으나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게 되지만 

보리는 익어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그래서 보리의 성을 지닌 남성은 

젊어서나 늙어서나 아내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는 천성이 있지만

여성은 늙었거나 교양이 있어 속이 익은 자는 

다소곳해지는 것이 정상적인 여성이라 할 수 있다.


여성인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듯이

나이든 여성들은 남성들의 천성(天性)을 통해 

체험해서 차차 이해하게 됨으로 

머리를 숙이듯이 이해하고 참아준다.

여기에 가정평화가 있고 

부부의 애정을 지킬 수가 있다.


벼싹도 처음에는 꼿꼿하게 고개를 숙이지 않고 

있음은 아직 나이 어리기 때문이다.


가화(家和)의 바탕은 아내에게 달려 있으므로

남편을 굴복 시키려는 생각이나 

남녀평등을 외치며 맞서려는 생각보다 

벼처럼 머리를 숙이듯이 저주면서 

“미소”와 “애교”라는 무기로 공격을 가한다면 

그런 아내에게 굴복하지 않을 철벽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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